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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와 한국 교회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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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저의 출신성분부터 밝히고 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는 어릴적 옆집에 살던 친구를 따라 고신에 소속된 교회에서 등록하고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고신에 소속된 교회에 출석하는 아무 직분이 없는 그냥 평범한 평신도임을 밝힙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신 총회는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배격하였던 옥중 성도들이 광복 이후 신앙의 자유를 되찾은 이후,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 운동으로부터 시작된 작은 교단입니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을 띄고 있고 이런 배경에서 쓰여진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8.15 이후 다시 코로나로 인해 한국이 시끄럽습니다. 다시금 늘어만가는 확진자 숫자들은 '이제는 코로나 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한국은 다른 나라들과 틀리구나'라고 희망을 품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작은 기대마저도 여지 없이 무너트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모임들을 취소 또는 외출을 자제할 것을 요구하며, 회사는 재택근무, 학교는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가 한창인 가운데 시위를 하고, 대면 예배를 주장하고, 정부의 방역 지침을 지키지 않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 사람들은 그런 주장을 하는지 그리고 그럼 어떻게 교회가 혹은 기독교 교인으로써 해야하는지에 대한 제 짦은 생각들을 정리보았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

 성경에 보면 재미있게도 예수님 시대에도 우리가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할지 질문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 성의 우물가에 한 여인을 찾아가 만나십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지금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며 여인이 가장 숨기고 싶었던 비밀을 들추십니다. 깜짝 놀란 이 여인은 예수님에게 이상한 질문을 갑자기 던집니다. 한마디로 하면 "어디서 예배해야 할까요?"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라고 답변 주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영이시니, 아버지께 영과 진리(진리의 영, 성령)로 예배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강조하시는 것은 어디에서 예배드려야 한다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전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분이 어떠한 분이시고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에 포커스를 맞추시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시기 때문에 공간을 초월하시는 존재라고 합니다. 즉,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만 하나님이 계셔서 거기서만 예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삶의 모든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의 장소보다 예배의 대상,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도는 예배의 대상인 아버지에 대한 자녀로써의 경외함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 자녀의 두려움은 엄청난 존경과 사랑과 찬양의 정신에서 탄생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자에게는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정치, 경제, 문화등 그 어떠한 것도 그 자리를 대체하거나 함께 할수도 없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 운동을 목적으로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숭고한 독립 운동의 의지마저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에 방해되지 않도록 경계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의 교회는 국가에 대한 충성과 종교를 혼합해버리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노력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종교와 국가주의를 혼합하려던 움직임이 있습니다. 바로 일본의 신사참배입니다.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을 진행할때 가장 큰 걸림돌 중에 하나가 교회였습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작은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이겼다던가, 작은 이스라엘 민족이 초 강대국의 업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는 내용들은 아무래도 일본의 입장에서는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기독교를 왜곡시켜 본인들이 이용하는 수단으로 삼기 위해서 일본화를 위해서 교회와 학교에서 신사참배를 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한국의 교회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의 정부 요구에 반대를 하지만, 반대를 하는 목회자들이 옥에 투옥되고 교회가 문을 닫게되었습니다. 남아 있던 자들은 일본의 강요와 억압에 의해서 신사참배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에 어긋나는 죄가 아니라 국가 행사라며 신사참배를 강행하게 됩니다. 이로인해 한국 교회는 기독교의 껍데기만을 남게 되었습니다.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버리고 예배의 형식, 종교의 형태만 간직하는 것을 선택해버렸습니다. 그 후로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던 보수적인 평양 신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고, 신사참배에 순응하였던 조선 신학교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은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고는 하나 이는 우상숭배에 대한 거부이지, 민족주의적 저항운동으로 볼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한분만 예배하겠다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에는 국가주의적인 미사여구를 갖다붙인 예배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예배라고 하는 것이 참 예배인지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지 종교가 아니라며 슬며시 들어오려고 했던 것 처럼, 예배라는 명목하에 국가주의 또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희석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정치 세력화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의 정치 이념이나 주장을 우상으로 세워 놓고 그것을 예배하는 껍데기만 교회라는 명찰은 단 이단입니다. 교회는 좌파도 우파도 될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며 하나님 나라의 청사진을 제시해야 합니다. 정치 이념의 아래에 매여 있는 곳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번도 정치적인 집회를 이끄시거나 반 로마 투쟁을 일으키시지 않았습니다. 단 한번도 예수님은 건물을 세우고 종교적인 형식과 껍데기를 위해서 힘쓰신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로마의 황제숭배를 무너트렸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부정이나 억압에 대해서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적극적인 교회의 사회참여는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교회가 그 거룩함을 회복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됨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사회 참여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독교 교인이 정부나 법에 대하여 저항해야하는 순간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은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못하게 하거나, 성경이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정부에서 요구할 때입니다. 지금 정부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 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비대면으로 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반하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변의 이웃을 배려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정부의 방역 방침을 적극적으로 모범이 되어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재난 상황에서 누구보다 앞서 봉사하고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광복 이후에도 교회를 지킨다는 명목아래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과오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일부 인사들은 기독교의 이름 빌려와서 하나의 정치 조직을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그 안에 정작 하나님기독교의 정신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교회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타협하였다면 이제는 자기가 예배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신흥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되었습니다. 

그럴수록 더 잘드려야 한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교회는 비대면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 아직 모이는 교회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하는 교회라면 지탄 받아야 마땅합니다. ) 덕분에 예배의 가치와 모이는 것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저 정해진 시간에 교회에 와서 앉아 있는 것을 예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종교적인 습관으로, 일련의 짜여진 순서에 따라 기도와 찬송, 봉헌, 강론을 듣는 것으로 진행되는 예식을 행하는 것만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앞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슨 정성을 다해서 드려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려야 겠지만, 여기서는 진리의 성령님을 의지해서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사람은 예배를 드릴만한 어떤 선한 것이 있어서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격없는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해서만 예배드릴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가신 예수님처럼, 우리에게 끝내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서 한 교회를 이루어 함께 예배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겸손히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고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굳이 교회에서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들어봤을 것같습니다. 한 사람(의도적으로 이 사람의 인종이나 종교에 대해서는 숨깁니다.)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당합니다. 강도 당해 죽게된 이 사람을 당시 종교적 지도자인 레위인이나 제사장은 그를 버려두고 지나갑니다. 세번째로 당시 유대 사회에서 경멸 받던 사마리아인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며 이 사람을 구해줍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이 강도 당한 사람을 알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인데, 예수님은 바로 이 사람이 강도 당한 사람의 이웃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은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 스쳐지나가는 사람 조차도 나의 이웃이라고 정의하십니다. 나를 멸시하고 비웃는 사람까지도 나의 이웃이라고 말씀하시고 그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이웃 사랑입니다. 

 재미있게도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이유는, 한 종교 지도자(율법사)가 자신의 율법에 대한 지식을 뽐내며 한가지 질문을 해오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요약된다고 하면서, 자신이 더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며 스스로의 발등에 도끼를 찍는 질문을 합니다. 이 종교 지도자는 자신이 사랑하고 싶어하는 이웃만 사랑하고 싶었고 그런 답변을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니가 싫어하는 그 사마리아인도 네 이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 일부 한국교회의 모습이 딱 율법사 같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하고, 내가 싫은 사람은 뭘 해도 밉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건 예수님이 사랑하라고 하셔도 안됩니다. 내가 만들어낸 우상을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무서웠던 것은 나는 저 사람들과 같지 않고 다릅니다라고 하며 지식을 뽑내는 율법사의 모습은, 한국 교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며 나는 저 사람과 다릅니다, 우리 교회는 저 교회와 틀립니다라고 말하며 선을 긋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과 똑같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렇다고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죄가 없고 무조건 용납해야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일반 시민들에게 그들의 잘못까지도 내 잘못으로 여기가 대신 사과하고 그들의 잘못을 정정해 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방지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사회적 거리두기로 많은 것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이웃 사랑의 실천은 모이지 않고 답답하더라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가고 싶어도 참고, 누굴 만나고 싶어도 참아야 합니다. 더워도 참고 마스크를 쓰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어색하고, 컴퓨터, 스마트폰으로 얼굴을 보고 모임을 하는 것이 어색해도 참고 적응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 앞서 방역에 힘쓰고 또 지치지 않게 힘이 되는 메세지들을 이웃들에게 주는 것이 지금 내가 할수 있는 이웃 사랑입니다.

일부 몰지각한 교회로 인한 코로나 사태로 인해 정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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